8. 논산-여산
거리를 보면 알겠지만, 그렇다, 우리는 논산을 뜨자마자 곧 바로 배가 고파서 비실비실하게 되었다. 아침 한 그릇만 먹고 오후까지 90km 가까이를 달렸으니 충분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그래서 충남에서 전북으로 진입하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여산면에서 밥 한 그릇을 때리기로 하였다.
30초만 더 걸어가면 꽤 그럴듯한 식당이 있었으나 우린 여기로 정했다
식당 내부는 어두컴컴하였고, 손 좀 씻을 수 없냐고 했더니 자전거 세워둔 곳 바로 옆에 있는 물통에서 알아서 물 떠다 씻으라는 이모의 부드러운 말씀(...) 동태찌개를 시켰고, 이모는 곧 동태찌개라 부르기에 참 거시기한 물건을 내놓으셨다.
물론 발로 만들어도 경상도 사람보다 음식을 잘 하는 전라도의 동태찌개가 맛이 없을 리는 만무하다. 나 경상도 사람이니 괜히 시비 걸지 말라. 배가 고팠던 우리는 동태찌개를 흡입했고, 공주에서 먹었던 아침과는 달리 밥을 고봉밥으로 퍼주시는 인심에 배터지게 먹어버렸다. 나는 아직까지 밀어내기를 하지 못한 상태. 결국 실컷 먹고 근처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야했다(...)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와, "자 이제 전주까지 한 방에 달리자!"라고 하자마자 협잡꾼 @jongleu 의 뒷바퀴에 바람이 빠졌다. 어제의 내 상황보다 더 처참하여 튜브에 아예 공기가 없어 그냥 밀고 나가기만 해도 타이어가 찢어질 것 같은 상태. 협잡꾼이 다시 자전거 포 아저씨에 버금가는 솜씨를 보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식당 옆 만두-찐빵집으로 가 자전거 포의 위치를 물었다.
나: 안녕하세요. 자전거로 여행 중인 사람들인데 바퀴에 펑크가 난 것 같아서요. 근처에 혹시 자전거 포가 없을까요?
주인: 음...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안을 보고) 엄니! 근처에 자전거 방이 있나?
엄니: 아따, 거시기, 자전거? 그게, 쩌그, 거시기, 저짝으로 나가서, 가면 거시기가 있잖여, 거기가 자전거 거시기 하는데여.
나: ?!?
주인: 아, 아까 저쪽으로 넘어 오셨죠? 그 길로 다시 쭉 나가시다보면 다리 건너기 전에 자전거 방이 있어요.
나: !!!
친절한 아저씨에게 찐빵이라도 팔아드리고 싶었으나 이미 배에 쳐넣을대로 쳐넣은 처지라 그저 감사하다고 인사만 드린 후, 거시기 방향으로 거시기하여 자전거 거시기하는 곳으로 거시기하기로 하였다(...)
물론 시골동네의 자전거 포가 제대로 자전거 포 모양을 갖추었을 리는 만무한 것. 동네로 들어오는 다리 옆에 새로 지은 건물이 자전거 포란 말을 듣고 지나가는 아저씨께 여쭈었다. 아저씨는 자전거 포 반대편 공터를 향해 "여그 자전거 보러왔네!!!!!!" 하셨다. 그랬더니 건너편 공터에서 드럼통 위에 고기를 얹어 놓고 막걸리를 드시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상당히 귀찮다는 표정으로 막걸리를 탁 비우시곤 느릿느릿 걸어오셨다. 이미 얼굴은 붉은색이었다. 지나가는 아저씨는 구경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자전거 고치는 것을 구경하고 계셨다(...) 그러다 나눈 짧은 대화. 엄밀히 말해 아저씨라기보다는 '할저씨'에 가까운 분들이셨다.
주인 할저씨: (협잡꾼을 향해) 그만한 등치로 이런 쪼꼬만 걸 타니께 빵꾸가 나지, 빵꾸가!
구경꾼 할저씨: 근디 어디서 왔어?
나: 서울서 출발해서 어제 천안에서 하룻밤 자고 오늘 넘어 왔어요.
구경꾼 할저씨: 아! 나 천안 아는 사람 있는디! 그 사람이 자전거를 870만원을 주고 샀는디 기아가 27단이여!
나: 오! 근데 그걸로 뭐 딱히 쓸 데가 있나요?
구경꾼 할저씨: 아, 거시기 뭐냐, 그 산에 보면 막 45도 각도로 된 데 있잖어? 거길 막 올라가!
주인 할저씨: (짜증난다는 듯) 기아가 50단이면 어떻고 100단이면 워뗘! 자전거는 그냥 자전거여!
구경꾼 할저씨: (전혀 굴하지 않고) 근디 870만원짜리 자전거가...
오랜만에 젊은 놈들이 와서 그런지 구경꾼 할저씨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고, 나는 아주아주 즐겁게 들어드렸다. 실제로 재미있기도 하였고. 꼼꼼한 성격의 협잡꾼은 펑크로 일정이 지체되었다는 사실에 꽤 짜증난 눈치였으나 뭐 펑크 때우려면 할 수 없는 상황. 27단 자전거가 어떻네, 30단 자전거가 어떻네, 왜 이런 걸 샀네, 전주는 왜 가네, 전주 가면 뭐 하네, 하면서 구경꾼 할저씨와 내가 만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수리가 끝났다. 사진이라도 한 방 찍었으면 좋았을 것을 정신이 없어 그냥 나온 터라 Daum 지도의 힘을 빌려 그곳의 사진을 남기려 했...으나... 응?
이 건물을 부수고 지은 새 건물에 자전거포가 있고(...)
이 담벼락을 부순 뒤편 공터에서 주인 할저씨가 막걸리를 드시고 계셨다(...)
뭐, 때론 추억이 아플 때도 있는 거다.
9. 여산-전주
여산에서 전주로 오는 길은 그야말로 한적한 도로였다. 이틀째 달려서 속도는 좀 줄었지만 반대로 지구력은 는 상태였고, 원래 예상 도착시각이었던 6시에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들녘을 옆에 끼고 달려가는 기분은 곧 다음 시를 생각나게 했다.
어느 해 늦가을 어느 날 오후
나는 경부선 급행열차를 타고 있었다.
열차가 수원(水原)을 지날 무렵,
서호(西湖)에 반사된 현란한 저녁해가
차창 가득히 어떻게나 눈부시던지,
나는 골든 델리셔스라는
사과덩이 속을 파고드는
한 마리 눈먼 벌레가 되었다.
추수가 끝난 들녘도
잎이 진 잡목숲도, 인가(人家)도,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과육(果肉) 속이었다.
- 김종길, <저녁해>
그리고 전주에 도착했다. 정작 덕진공원 입구에서 협잡꾼이 약간 돌아오는 바람에 계속 뒤처지던 내가 의외로 골인지점에는 먼저 도착하는 그런 바람직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우리보다 하루 먼저 내려온 백수 후배놈이 모텔(...)에 트윈 룸을 잡아 둔 상황이라 바로 숙소로 향했다. 협잡꾼과 내가 트윈 베드를 하나씩 차지하고 녀석이 바닥에 자게 될 것은 불보듯 뻔한 노릇. 물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고.
그날 아침에 서울에서 내려온 또다른 한 무리의 후배들이 있어서 한꺼번에 막걸리를 푸기로 하였다. 약속 시간은 7시 30분. 남자 세명이서 모텔에 앉아 할 일은 역시,
후배놈은 열혈 기아팬이고, 나는 출생의 원죄 탓에 삼성팬이며 협잡꾼은 삼성만 아니면 다 좋다, 파였기 때문에 결국 위와 같이 맞춰 놓고 야구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각 팀의 뻘짓에 다른 타이밍에 쌍욕이 난무하는 아름다운 상황도 연출되었다. 때로는 함께 욕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최희섭.
막걸리는,
누가 뭐래도,
삼천동이건만!
멍청한 후배들이 인터넷 어디에서 봤다고 쓰잘데기 없는 막걸리 집으로 데려갔다. 후일 전주 출신의 Jungle군에게 물어봐도 "그런 듣보잡은 정말 듣도 보도 못했군요."라는 반응을 얻어 낸 놀라운 집. 3일간이 전주 여행 중 최악의 음식(사실 이게 메인이 되어야 했건만!)집이었다. 물론 맛은 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으니,
막걸리만 어설프게 퍼먹었기에 짜증난 우리는 가맥집으로 넘어갔다. 역시 후배들이 어디서 보고 온 게 있어서 유명한 곳으로 갔다. 슈퍼마켓에서 맥주 먹으려고 줄까지 섰다. 도대체 왜!
물론 즐거운 술자리였지만 더 즐거운 건 다음날이었다. 1년만에 한옥마을에 갔으니까.
덧) 분명히 즐거웠던 시절, 전주 삼천동에 놀러가 막걸리를 먹었던 사진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사진을 찍고 컴퓨터에 넣어두지 않은 것인가, 아예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인가. 그럴리가. 성균관 스캔들 촬영중인 모습을 카메라로 찍기도 했던 것 같은데. 흠. 이것 참. 좀 슬프군.
덧2) 이것으로 서울-전주 자전거 이동은 끝났다. 다음날은 전주 시내를 돌아보고 자전거는 버스에 실어 올라왔으니까. 포스팅은 한 번만 할 예정이다. 총 이동 거리는 232.66km(잠실 종합운동장-전주 덕진공원) 이틀 동안 쉬엄쉬엄 달리면 오전-오후로만 해도 충분히 갈 거리다. 그렇다면 그대로 돌아올 때도 자전거를 타면 되지 않는가, 하는 못된 질문을 하는 인간들이 몇몇 있던데... 가 봐라,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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