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때는 죽은 후 신의 저울 앞에서 영혼의 무게를 달 때 뿐일 것이다. 게다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같은 사람은 어머니의 뱃 속에서부터 무덤 속에 묻혀지는 그 날까지 '나'라는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였나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지만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에 수천년동안 철학자들이 매달려 여러가지 궤변을 늘어놓아 보았던 것일게다.

이렇게 멋진 타이틀은 오랜만이다!
결국 인간은 어떻게 규정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다면 우리가 빌려야 할 것은 남의 시선이다.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7명의 밥 딜런을 표현한 6명의 배우. 토드 헤인스의 <아임 낫 데어>는 대중음악계의 전설 중 하나인 밥 딜런이 누군지 알 수 있는 약간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물론 이 영화를 봤다고 해서 밥 딜런에 대해 알았다고 보기에는 힘들 것이다. 차라리 <포크음악사>나 <록음악의 역사>, <저항가수 밥 딜런>, <밥 딜런 평전> 등을 잠깐이라도 읽는 편이 아는 척 하기엔 훨씬 낫다.
내가 본 <아임 낫 데어>는
밥 딜런이라는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시선들에 대한 것이었다. 밥 딜런의 1965년, 1966년 기자 회견장의 모습을 재현한 아르튀르 랭보(벤 위쇼 분), 밥 딜런의 한창 때(?) 모습을 보여준 잭(크리스쳔 베일 분), 오토바이 사고 이후 목사로 돌아온 잭(크리스천 베일 분), 1965년, 1967년의 밥 딜런을 그린 골초 중의 골초 쥬드(케이트 블랑쳇 분:누님 짱이에요!), 밥 딜런의 연애사, 가족사를 연상시키는 로비(히스 레저 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밥 딜런의 음악적 스승 우디(마커스 칼 프랭클린 분), 밥 딜런의 은둔자적 삶을 보여주는 빌리(리차드 기어 분: 오랜만인데도 좀 짱인 듯.)는 모두 밥 딜런 그 자체가 아니다. 밥 딜런이라는 인간을 가운데에 둔 채 주변이 수많은 시선들이 그를 재단하고, 규정할 때의 모습들이다.
각각의 밥 딜런은 나이, 인종, 시대를 넘어 성별까지 다른 모습이다. 모두는 하나를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두는 다른 것을 표현하고 있다. 밥 딜런에 대한 영화이면서 끝까지 'Bob'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의미다. 무수한 밥 딜런의 명곡들이 때로는 본인의 목소리로, 때로는 타인의 목소리로 흘러나와 팬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끓게 하지만 어디에도 밥 딜런은 없다. 그를 연상시키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누구도 자기가 밥 딜런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로 갖고 온 듯 하면서도 약간씩 비틀어 우리가 알고 있는 '진퉁'과는 다른 어떤 존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진짜 1965년에 그랬다고? 진짜 기자회견장에서 그렇게 했다고? 진짜 쇼에서 나와서 그렇게 했다고? 백번, 천번을 물은 들 아무 의미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하기를 이 영화를 보고 밥 딜런을 알겠다고 나설 바에는 그냥 <포크음악사>를
읽으라고 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끝없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고 사는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밥 딜런(뭐, 우리나라에서는 몰라도 관계없다. 나 또한 그러니까.)같은 사람도 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천차만별이다. 흑인 꼬마 - 그의 음악적 스승 우디 역이지만, 사실 우리는 은연중에 '스승'을 '제자'와 연결 짓는 짓을 자주 하지 않는가 -가 그려도, 카리스마 넘치는 여인이 그려도, 호주 남자 배우가 그려도, 기름기 철철 흐르는 느끼함의 대명사 기어형님이 그려도 모두가 밥 딜러이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한다. 이렇게 되고보면 대체 진짜 밥 딜런은 어떤 인간이었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든다. 그는 누구였는가?

이게 '진퉁' Bob Dylon인가?
영화는 누가 진정한 밥 딜런인가에 관심없다. 스스로가 '내가 밥 딜런이오!'라고 외치지 않는 한 그가 어떤 이름으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느꼈던 순간순간의 밥 딜런의 모습을 잡아 영상에다 넣었다. 길지 않다. 각각의 사람들은 끝없이 교차편집되면서 나타난다. 담배를 피울 때 밥 딜런과 은둔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밥 딜런이 있을 뿐 이를 관통하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다. 한가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밥 딜런이라는 사람을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는 예술을 하던 사람이었고, 음악을 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6명의 밥 딜런은 모두 음악을 한다. 심지어 영화배우로 등장하는 로비도 '잭 롤린스'의 영화에 나오며 기타를 메고, 추격을 피해 다시 기차에 타고 길을 떠나는 빌리도 'The Machine Kills Facist" 기타를 찾아서 연주한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그의 노래고 음악이었다. 밥 딜런을 바라보는 무려 7개의 시선에 달하는 외부의 시선들은 그를 산산히 쪼개어 놓았지만 그에게서 음악을 분리시킨 채 생각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음악이 있었기에 우디가, 잭이, 존이, 쥬드가, 빌리가, 로비가 아니라 밥 딜런으로서 이 영화에 서 있을 수 있었다.
팬을 만난 쥬드(뒤에 소녀떼에게 쫓기는 비틀즈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화두를 바꾸어야겠다.
"나는 나의 인생을 관통할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가?"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담배나 한 대 피우며 생각해봐야겠다.
덧) 이 영화의 매력은 음악과 7명의 밥을 표현하는 스타일만이 아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한숨 지었던 것은 우디와 빌리의 컷에서 등장하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평원이었다. 기차에서 보이는 경치는 괜시리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게 하고픈 아련함이 있었다. 작년 2월인가? 호주 시드니에서 밀두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본 풍경이 생각난다. (이 사진들은 크기를 줄이지 않는다.)
덧2) 벌써 발행해 놓고 까먹은 것이 있어서 하나 더 사족을 단다. <Knocking on Heaven's Door>다. 원래 밥 딜런 곡이다. 그냥 듣고 싶어서 달았다. 괜히 감상하고 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