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네 데카르트, <성찰>
역시 대가(大家)의 글은 대단하다. 언젠가 철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요약서나 해설서도 좋지만 원전에 한번 도전해보라고 말이다. 솔직히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조금 미안하긴 하다.) 철학책, 하면 역시 지겹고 재미없고 하품나고 짜증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철학은 재밌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 '쉽고 재미있게 풀이된' 것을 읽을 때나 그러하다. 영화, 만화 등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보면 얼마나 재밌어 보이는가. 그러나 철학을 철학 원전으로 접한다는 것은 역시 무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었다. 생각보다 읽을 만 했다, 가 나의 소감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거나 하는 것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느낀 것, 그것을 써볼 생각이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달아볼 생각이다. 이 글은 "철학"에 대한 글이 아니라 "책"에 대한 글이다.
1. 방법적 회의, 그리고 코기토 명제 데카르트 하면 '코기토 명제'와 함께 '방법적 회의'라는 말이 떠오른다. 방법적 회의란 신체를 전제하는 지식, 물질적 사물들의 본성에 관한 지식을 모두 배제하고 남는 가장 확실한 지식을 찾는 것을 말한다.
말이 어렵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웃기는 소리!"라는 비판을 들을 만 한 것은 모조리 쳐낸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 하면 어떡할건데? 어쩌면 ~ 할 수도 있지 않아? 소리가 나올 만한 것은 모두 배제한다. 그리고 사유한다. 그것이 방법적 회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쳐내고 나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된 지식, 데카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명석판명한 인식"만이 남는다. 오직 하나, 코기토 명제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에 대한 논리는 간단하다. 만약 내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의심하고 있는 나를 의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생각을 해야 존재하지
여기서부터 걸어나가는 것이다.
2. 성찰, 그 최종 목표는? 데카르트는 그렇게 지독하게 생각한다. 의심나는 것들을 모조리 쳐버리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만 좇아간다. 그가 그렇게까지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 발판인 코기토 명제가 완벽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명제라는 것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하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그러면 네가 생각하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아하. 꽤 아프다. 데카르트도 꽤나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大家)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실 코기토 명제가 "명석판명한 인식"이라 할 수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즉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결여된 완전성을 내 스스로에게 부여했겠지. 그런데 없잖아? 그러면 내가 보존되려면 누군가가 나를 보존해주어야 하지. 그런데 말야, 나를 보존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존재여야 하잖아. 난 신이라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어. 그렇다면 나를 보존해줄 그 존재도 신이라는 완전한 존재를 넘어설 정도가 되어야 하지. 결국 신과 같은 완전성을 지닌 존재는 신 밖에 없어. 무한대 더하기 무한대는 무한대니까 말이지. 결국 신은 현존한다고.
그렇다. 그는 신이 필요해져버렸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칼같이 나누는 오만함을 보인 그가 결국 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어째서 그는 신이 필요했을까?

Do you need me?
그는 신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함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니,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해방시켰니 하는 이야기를 듣는 데카르트지만
사실 그가 <성찰>을 쓴 이유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만 들입다 외우고 있을 뿐이다.
신과 영혼에 관한 문제는 신학보다는 철학을 통해 논증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신은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 신자들은 신앙에 의해 충분히 믿을 수 있지만, 비신자들은 이 두 가지 것이 먼저 자연적 근거에 의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어떤 종교나 도덕상의 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르네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2006, p. 15.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 촉발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은 급기야 데카르트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적 철학을 통한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단순히 "믿으라"고 해서는 믿지를 않으니 너희들이 믿고 있는 '이성', '철학'이라는 걸로 신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 외에도 또다른 방식의 인과론적 증명, 존재론적 증명을 했다.)
그러하기에 다음과 같은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에 것에 관해 말하자면, 그런 것은 태양이 이런 크기나 저런 모양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은 특수한 사항이거나, 빛, 소리, 고통과 같이 덜 판명하게 인식되는 것일 터 인데, 이들 모두는 아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지만 신은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내 의견 속에 어떤 허위가 있으면, 이를 교정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나에게 부여했을 것이기에 위의 사항에 있어서도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 르네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2006, p. 111.
정신과 사물, 주체의 이성과 객체의 자연을 분리시켰지만 주체가 객체를 인식함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확인해 줄 제삼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신일 수 밖에 없다.
3.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남은 데카르트의 역설 이렇게 17세기에 등장한 여러가지 과학적 기획들을 정당화하면서 신학과의 화해를 추구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데카르트는 역설적으로
'신'이 존재를 규정하던 중세를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 존재를 탐구하게 되는 근대철학의 아버지가 된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함은 신이 진흙으로 몸을 빚은 후 숨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여전히 믿는 사람이 천지다.)은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는 데 한계를 만들었다. 더 이상 생각하다가는 '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하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과학은 '신'과는 별도로 철저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갔고 급기야 신학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근대철학이라는 것을 낳았다. 그 사이에서 화해를 시도한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의 아버지가 되는 역설은 당연해보인다. 물론 정신과 물질을 제대로 나누어버린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는다. 결국엔 '신'이라는 존재에 기대어야 했기 때문이다.
역설, 역설, 역설이다. 신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시도한 과학적 철학은 그를 신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해내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만들었고, 그의 철학이 비판받는 지점은 "여전히" 신에게 기대야 한다는 부분이라는 역설.
우리가 사는 방식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목적한 바와 관계없이 성취되는 어떤 지위, 혹은 성과, 그러나 그것이 다시 나의 목적과 결부지어져서 잃게되는, 혹은 비판받는 것 말이다. 인간 세상에서 목적과 의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까? 항상 목적과 의도에 '맞는' 결과, 혹은 '맞지 않는' 결과만 존재하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경우를 봤을 때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사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네놈이 그 신이냐? 아... 엄청 역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