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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낙심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보고, 생각하고, 그 결과물을 소통하는 데 있어서 항상 당당하고 싶다.
 
Don't Feel Sorry For Your..
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산다는 것은
다시 글로 표현하는
무작정 가다보면
잊으면 안되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득채의 I AM A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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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09 몸이 아프다
  2. 2008/06/27 삶에도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3. 2008/06/17 신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근원적 한계 - 데카르트, <성찰>
  4. 2008/06/10 참을 수 없는 관계 맺기의 어리석음 - 김영민, <동무와 연인>

  지난번에 엄살(?)을 올리긴 했지만 이번엔 제대로인 것 같다.

  마치 몸살이 온 것처럼 근육들이 다 비명을 질러댄다.

  오늘 예정에 없었던 시험대비 수업을 갑자기 맡게 되어 12시 쯤 되었을때는 눈에서 불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열이 심하게 나면 눈에 불이 난다. 온몸마다 전부 열이다.

  수업이 끝나고 원장선생님이 이선생 몸이 도저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며 몸보양이라도 좀 하자고 하셨다. 근처에서 꼼장어를 먹고(술은 물론 안 먹었다. 내가 술을 안 먹는다는 사실에 다른 선생님들이 전부 깜짝 놀라버리는 안타까운(?)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집에 들어왔다. 원래 이 시간까지 잠을 자는 경우는 잘 없기에 피곤하지는 않지만 몸 전체가 제정신이 아님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술자리가 끝나고 나랑 늘 어울려 술을 한잔씩 하는 선생님들은 남았고 난 일어섰다. 월급날이라 원장선생님을 따라 나와야 했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를 "살리기" 위해서도 더 앉아 있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월급을 받고, 추어탕 사먹으라며 돈을 조금 더 주셨다. 꼼장어를 먹여서 미안하단다. 헛참,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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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어탕!


  술을 많이 먹으면 몸에 힘이 빠지는 친구가 있었다. 오늘 내 상태가 그 모양이다. 물론 술을 안 먹어도 하루 종일 내 몸을 마음대로 가누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일은 괜찮아지려나? 공부도 해야 되는데 이러다가 대체 언제 공부를 하지? 쩝.

  내일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바쁜 동생과 함께 그 돈으로 밥이나 먹고 좀 '살아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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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1 18:13
    비밀댓글 입니다


  초등학교 수업 시간은 40분, 중학교 수업 시간은 45분, 고등학교 수업 시간은 50분이다. 대학은 2학점, 3학점 등 학점에 따라 한번에 소화해내야 할 수업 시간이 정해지지만 대략 1시간 30분 정도 하면 쉬는 시간을 갖는다. 쉬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이유는, 특히 학업을 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정해 놓은 시간을 넘어버리면 그 연령대의 평균적인 학생들이 집중력을 지속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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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앉아 쉬는 것만이 쉬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출처: http://blufins.com)


  나도 쉬는 시간이다. 2월에 귀국하여 2주 정도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을 뵙고, 친구들을 만나고, 복학 준비를 하고, 일자리를 구하고, 방을 구했던 시간을 제외하면 정신없이 달려왔다. 교생 실습을 나가는 4학년 1학기에 무려 21학점을 신청해놓고 저녁마다 6시간씩 일을 하면서 수업-교생-과제-시험 등을 거쳤다. 내가 내 나름대로 쓸 수 있었던 시간은 그 와중에도 한번씩 만났던 친구들과의 간단한 술자리나 밤 12시에 퇴근하여 하루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면서 단견이나마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지지난주에 종강을 했다.

  그리고 2주째 쉬는 시간을 갖고 있다. 물론 취업 준비를 해야하니 TEPS책도 사고, 한자능력검정 책도 샀다. 이틀정도 학교 도서관에 앉아 공부하는 척(?) 해보기도 했으나 쉬는 시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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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에만 쉬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숨쉴 틈도 없이 한 학기를 달려왔더니 삶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는 것 같다. 종강 이후 바로 무엇인가를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에서부터 자꾸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책도 읽고, 음악도 좀 듣고, 하는 여유라도 가졌으면 괜찮았을 텐데 도무지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조금 여유로워져서인지 아주 대학생스럽게(이 얼마만의 대학생인가!) 종강 후 술자리도 잡히고, 약속도 생긴다. 슬쩍 빠지고 내가 해야할(!) 공부를 해도 되건만 쉽지 않다. 역시 쉬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을게다. 사람들과 만나 사는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는 것이 그리웠던 것 같다. (물론 그러다보니 어제는 일을 마치고 12시에 퇴근해서 집에서 완전히 뻗어버렸지만 말이다.)

  7월이 되면 다시 오전에는 학교에 나가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일을 하는 일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자유롭게, 즐기면서 산다는 것도 물론 좋고,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취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생에게는 나태요, 태만이다. 내 인생에 대해서는 직무유기요, 책임방기다.

  하지만 열심히 살았으니 2주 정도는 슬쩍 쉬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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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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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6/27 15:35
    비밀댓글 입니다
  2. BlogIcon LIVey
    2008/06/30 17:12
    저는 너무 많이셔서 문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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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데카르트, <성찰>

  역시 대가(大家)의 글은 대단하다. 언젠가 철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요약서나 해설서도 좋지만 원전에 한번 도전해보라고 말이다. 솔직히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인데 조금 미안하긴 하다.) 철학책, 하면 역시 지겹고 재미없고 하품나고 짜증난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철학은 재밌지만 그것은 누군가의 시각에 의해 '쉽고 재미있게 풀이된' 것을 읽을 때나 그러하다. 영화, 만화 등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보면 얼마나 재밌어 보이는가. 그러나 철학을 철학 원전으로 접한다는 것은 역시 무리라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르네 데카르트의 <성찰>을 읽었다. 생각보다 읽을 만 했다, 가 나의 소감이다. 전체 내용을 요약하거나 하는 것은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느낀 것, 그것을 써볼 생각이고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달아볼 생각이다. 이 글은 "철학"에 대한 글이 아니라 "책"에 대한 글이다.

1. 방법적 회의, 그리고 코기토 명제

  데카르트 하면 '코기토 명제'와 함께 '방법적 회의'라는 말이 떠오른다. 방법적 회의란 신체를 전제하는 지식, 물질적 사물들의 본성에 관한 지식을 모두 배제하고 남는 가장 확실한 지식을 찾는 것을 말한다.

  말이 어렵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게 "웃기는 소리!"라는 비판을 들을 만 한 것은 모조리 쳐낸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 하면 어떡할건데? 어쩌면 ~ 할 수도 있지 않아? 소리가 나올 만한 것은 모두 배제한다. 그리고 사유한다. 그것이 방법적 회의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쳐내고 나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된 지식, 데카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명석판명한 인식"만이 남는다. 오직 하나, 코기토 명제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에 대한 논리는 간단하다. 만약 내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의심하고 있는 나를 의심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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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야 존재하지


  여기서부터 걸어나가는 것이다.

2. 성찰, 그 최종 목표는?

  데카르트는 그렇게 지독하게 생각한다. 의심나는 것들을 모조리 쳐버리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만 좇아간다. 그가 그렇게까지 달려가기 위해서는 그 발판인 코기토 명제가 완벽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명제라는 것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하다.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그러면 네가 생각하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냐?"

  아하. 꽤 아프다. 데카르트도 꽤나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대가(大家)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실 코기토 명제가 "명석판명한 인식"이라 할 수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즉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결여된 완전성을 내 스스로에게 부여했겠지. 그런데 없잖아? 그러면 내가 보존되려면 누군가가 나를 보존해주어야 하지. 그런데 말야, 나를 보존할 수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존재여야 하잖아. 난 신이라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어. 그렇다면 나를 보존해줄 그 존재도 신이라는 완전한 존재를 넘어설 정도가 되어야 하지. 결국 신과 같은 완전성을 지닌 존재는 신 밖에 없어. 무한대 더하기 무한대는 무한대니까 말이지. 결국 신은 현존한다고.

  그렇다. 그는 신이 필요해져버렸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칼같이 나누는 오만함을 보인 그가 결국 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어째서 그는 신이 필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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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you need me?


  그는 신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함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니, 신학으로부터 철학을 해방시켰니 하는 이야기를 듣는 데카르트지만 사실 그가 <성찰>을 쓴 이유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나는 사유한다, 고로 존재한다."만 들입다 외우고 있을 뿐이다.

  신과 영혼에 관한 문제는 신학보다는 철학을 통해 논증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신은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 신자들은 신앙에 의해 충분히 믿을 수 있지만, 비신자들은 이 두 가지 것이 먼저 자연적 근거에 의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어떤 종교나 도덕상의 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르네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2006, p. 15.

  근대과학이 발전하면서부터 촉발된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은 급기야 데카르트라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적 철학을 통한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단순히 "믿으라"고 해서는 믿지를 않으니 너희들이 믿고 있는 '이성', '철학'이라는 걸로 신을 증명하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 외에도 또다른 방식의 인과론적 증명, 존재론적 증명을 했다.)

  그러하기에 다음과 같은 부분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에 것에 관해 말하자면, 그런 것은 태양이 이런 크기나 저런 모양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은 특수한 사항이거나, 빛, 소리, 고통과 같이 덜 판명하게 인식되는 것일 터 인데, 이들 모두는 아주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다. 그렇지만 신은 기만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내 의견 속에 어떤 허위가 있으면, 이를 교정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나에게 부여했을 것이기에 위의 사항에 있어서도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 르네 데카르트, <성찰>, 이현복 역, 문예출판사, 2006, p. 111.

  정신과 사물, 주체의 이성과 객체의 자연을 분리시켰지만 주체가 객체를 인식함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확인해 줄 제삼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신일 수 밖에 없다.

3.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남은 데카르트의 역설


  이렇게 17세기에 등장한 여러가지 과학적 기획들을 정당화하면서 신학과의 화해를 추구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데카르트는 역설적으로 '신'이 존재를 규정하던 중세를 벗어나 '인간'이 스스로 존재를 탐구하게 되는 근대철학의 아버지가 된다.

  인간이 세상에 존재함은 신이 진흙으로 몸을 빚은 후 숨을 불어넣어 주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여전히 믿는 사람이 천지다.)은 인간이 스스로 사유하는 데 한계를 만들었다. 더 이상 생각하다가는 '신'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에 대한 의문까지 들게 하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과학은 '신'과는 별도로 철저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갔고 급기야 신학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근대철학이라는 것을 낳았다. 그 사이에서 화해를 시도한 데카르트가 근대철학의 아버지가 되는 역설은 당연해보인다. 물론 정신과 물질을 제대로 나누어버린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는다. 결국엔 '신'이라는 존재에 기대어야 했기 때문이다.

  역설, 역설, 역설이다.

  신의 존재를 규명하기 위해 시도한 과학적 철학은 그를 신으로부터 인간을 분리해내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만들었고, 그의 철학이 비판받는 지점은 "여전히" 신에게 기대야 한다는 부분이라는 역설.

  우리가 사는 방식도 그런 것 같다. 내가 목적한 바와 관계없이 성취되는 어떤 지위, 혹은 성과, 그러나 그것이 다시 나의 목적과 결부지어져서 잃게되는, 혹은 비판받는 것 말이다. 인간 세상에서 목적과 의도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일까? 항상 목적과 의도에 '맞는' 결과, 혹은 '맞지 않는' 결과만 존재하는 것일까? 데카르트의 경우를 봤을 때는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사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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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그 신이냐? 아... 엄청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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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옳은길
    2008/06/23 07:32
    우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부시가 하는 일이 곧 신이 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십시오. 현재 네오콘이라 일컬어지는 부시 정권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기독교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의 무력충돌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오나, 개인적으로 진정한 기독교 정신은 '평화'를 통해(예수께서는 비폭력적으로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에 맞섬) 포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미국의 흑인 인권을 위해 싸우다가 암살당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같이 말입니다.
    딴지는 아니고요 그저 마지막의 부시 이미지가 기독교와 부시 정권을 대입시킨 것 같아서 한 말씀 끄적여 보았습니다. ^^*
    • BlogIcon freesopher
      2008/06/23 13:27

      마지막 사진은 사실 "GOD"라는 검색어로 구글에서 사진을 찾기 위해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재미있는 것이라 끝에 단 것입니다. (글의 논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GOD"이라는 표현이 문제가 되리라 생각했지만 일종의 패러디라 생각해주세요. 설마 제가 "저.걸." 신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동무? 연인?

  동무의 사전적 정의는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이고, 연인의 사전적 정의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남녀, 혹은 이성으로서 그리며 사랑하는 사람이다. 언어가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정의에 합의했으며 같은 의미로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동무와 연인』에서 김영민의 정의는 달랐다. 어쩌면 일종의 칼럼, 수필집임에도 처음부터 내용이 어렵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동무는 불가능한 것을 가리킨다. 가능하지만, 오직 타락했으므로, 닿을 수 없으므로 가능해지는 사연들을 일컬어 연인이라고 부른다. 가족을 버리지 않으면 스승을 따를 수 없었던 경험처럼, 스승, 혹은 그 지평으로서의 동무의 불가능성을 증명해주는 세속의 덕으로 우리 모두는 친구를 구하고 연인을 사귀며 가족을 얻어 다시 세속에 보은한다.


  뜬금없게 느껴지는 서문의 동무와 연인에 대한 재정의는 책의 한 꼭지 한 꼭지마다 다시 재정의된다. 일관성 있게 진행될 것 같아 보이면서도 동지, 친구, 애인 등의 개념과 함께 다시 한 번 뒤섞인다. 추상적인 정의가 가진 한계다. 작가 본인 또한 그다지 명확하게 의미를 잡아놓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일까? 절반쯤 읽었을 때부터 동무와 연인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무와 연인이라는 것은 요즘 말로 일종의 ‘낚시’다. 쇼펜하우어와 요한나의 관계는 동무인가, 연인인가? 어째서 루 살로메와 니치의 관계는 연인일까? 크레이스너와 폴록의 만남이 연인/동무의 생산성을 폭발시켰다는 것은 결국 둘의 관계는 무엇이라는 말일까? 따위의 질문에 얽매어 있다가는 책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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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동무와 연인>


  결국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은 관계(關係,relationship)에 대한 책이다. 특히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이라 붙은 부제에서처럼 인간이 다른 인간-혹은 인간들-과 맺는 관계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그 대상을 철학자(피카소는? 하지만 피카소를 철학자로 부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로 삼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철학자는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을 업으로 삼은 자다. 우주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역사에 대하여, 다른 어떤 분야에 대하여 대가를 이룬 철학자의 사상은 항상 인간으로 귀결된다. 인간이 무엇인가, 그 불안하기 짝이 없는 존재에 대한 의미 탐구는 철학자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과 밀접한 관련을 맺도록 강요한다. 혹은 철학자의 실제 인생사는 그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들의 관계를 보는 것은 범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는 무수한 관계를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철학자가 인간에 대하여 갖는 태도는 인간이 타인에게 가질 수 있는 극단적인 모양이라 해도 무리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사물의 극단은 그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게 한다. 김영민의 『동무와 연인』에서 보여주는 철학자들의 관계는 결국 인간이 맺는 관계들의 본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이 맺은 관계의 몇 가지 모습들과 함께 나의 짧은 생각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관계1: 마음과 마음
 

  필자가 「스승, 혹은 제자」라는 꼭지로 소개한 사람은 유영모와 김흥호였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가 맺을 수 있는 관계의 끝을 보여주는 두 사람은 부처와 가섭이다. 필자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는 대로 가섭은 부처님의 글도 말(소리)도 아닌 마음을 받은 제자로 선종(禪宗)의 역사에서 한 꼭짓점을 이룬다. 물론 부처님과 가섭의 관계야말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를 수 있는 한 지극한 경지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염화미소(拈華微笑)로 대변되는 전심(傳心)의 이치다.


  둘의 관계가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부재(不在)다. 이 책의 부제,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에서 보듯이 어떠한 관계도 매개체가 없이는 맺어질 수 없다. 하다못해 인사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의 ‘말’은 ‘철학’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처와 가섭은 말도 필요 없다. 스승과 제자라면 응당 무언가를 가르치고 배워야 할 텐데 둘 사이에는 그런 과정이 생략되어 버린다. 철학의 할아버지(!)라 불러도 손색없을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말을 했다. 상대방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거기에서부터 그가 이미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끌어내려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부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제자 가섭 또한 그럴 필요가 없었다. 부처가 깨달은 이라면, 가섭은 부처를 깨달았으니 그 또한 깨달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