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돌아갈 때로 돌아간다는 것 - 진소천 철교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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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민박집은 제천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백운동 이라는 곳이었다. 아침
에 일어나 주인아주머니께서 해주는 밥을 대충 챙겨먹고 제천으로 나왔다. 밤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전날과는 달리 날씨가 맑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 가는 것 같았다. 나도 간만의 휴식이기에 계획했던 대로 충주호로 가려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버스 정류장에서 원래의 계획을 간단히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충주호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6대가 있었고 나는 너무나 멋지게 5분전 버스를 놓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의 일이 꼬인 것은 날씨 탓으로 돌릴 수 있었지만 쾌청한 날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것은 누구를 탓해야 하는지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굴할 수 없었기에 표 파는 아주머니께 근처에 괜찮은 휴양지가 있
냐고 물었다.
잠시 후 의림지로 향하는 시내버스를 타고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 인터넷과 전화 등으로 미리 알아보고 왔건만 얼마 전 바뀌었다는 시간표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상황에서 쉽사리 즐거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제천에서 의림지까지는 꽤 가까웠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자 바로 의림지였다. 날씨가 좋아서 제천 시민들이 많이 나와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천천히 의림지로 걸어 들어가며 나도 ‘즐기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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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의림지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저수지다. 물론 지금까지 그것이 남아 있을 리 없기에 다시 복원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꽤 넓었고 의림지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는 마치 어린 시절 대구에서 자란 내가 소풍마다 어쩔 수 없이 갔던 ‘냉천 자연 랜드’ 수준의 놀이기구들도 마련되어 있었다. 롯데월드를 생각하면 약간의 서글픔도 느껴졌으나 나름대로 청소년들이 즐기고 있었기에 초등학교 때의 소풍을 생각하며 그들
의 모습을 구경했다. 의림지는 아름다웠다. 시민들이 주말에 찾을 만 했다. 입구에서 뻔데기를 한 봉지 사들고 천천히 주위를 걸었다. 호수는 아름다웠고 나무는 잘 손질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뻔데기를 사먹은 곳과 같은 노점상이 곳곳에 서 있어 경관을 해치고 있었다. 뻔데기를 먹고 있는 주제에 ‘경관을 해친다’고 느끼는 내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 뒤에는 항상 우리가 서 있다. 예전에 종로에 즐비해 있던 떡볶이 노점상을 치우자는 말에 프로판 가스가 위험하다는 둥, 비위생적으로 보인다는 둥, 외국인에게 부끄럽다는 등 따위의 근거를 들어 찬성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 떡볶이 안 사먹은 사람 없고, 안 즐기는 사람 없었다. 그들을 실컷 비웃었던 내가 이번엔 뻔데기 먹으면서 뻔데기 파는 사람들을 욕하고 있으니 스스로에게 웃음이 나올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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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의림지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우며 휴대폰을 꺼냈다. 제길. 시간이 늦었다. 공전역으로 가는 기차가 2대 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다. 진소천 철교로 가려면 공전역에서 철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피우던 담배를 끄고는 의림지를 빠져나왔다. 내 뒤의 의림지는 제천 시민들의 웃음으로 가득했다. 아저씨들은 막걸리를 한 사발씩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누구에게 질세라 달리고 있었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커플들은 마치 자신들이 성인인양 어디서 주워 본 적은 있는 어설픈 애정행각을 벌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으며 갑자기 나타난 폭주족 할아버지(?)들은 뻔데기를 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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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제천역으로 향하면서 시내를 천천히 살펴볼 수 있었다. 서울처럼 쓸데없이 높은 빌딩은 당연히 없었다. 기껏해야 3층 정도 되어 보이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제천의 모습은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위압적인 높은 건물들은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서울에서 나는 늘 좁은 세상만을 보았다. 서울이 넓은 세상이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물론 서울은 크기가 크고 갖가지 사람들이 얽혀 살고 있어 ‘넓은 세상’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울의 입장에서이지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서울에서 나의 시야는 언제나 내가 걷고 있는 거리의 풍경이 다였다. 고개를 돌려보아도 건물들 뿐 뻗어 있는 도
로 쪽에서 반대편을 바라보지 않는 한 나의 시야는 인도의 폭을 넘지 못했다. 시선을 돌리면 언제나 건물에 가로 막혀 있었다. 서울의 건물들은 나를 제한했고 옥죄었다. 답답해서 고개를 들면 하늘이 보인다. 그러나 원으로 보이는 하늘의 가장자리에는 건물의 끝이 삐죽삐죽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천의 거리를 걸으며 본 하늘은 둥글고 넓었다. 거기에는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의 건너편이 보인다. 동네 뒤에 있는 산이 보인다. 이것은 나에게 묘한 편안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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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앞에 늘어서 있는 가게의 모습들도 눈길을 끌었다. 제천역 광장에서 시내 쪽으로 나있는 길의 길가에는 마치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 분위기의 식당들이 있다.
특히 ‘영화분식’이라는 곳과 ‘제일식당’은 간판부터가 강력한 포스를 풍기는 곳이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들어가 보지 않았지만 왠지 할머니가 앉아서 충청도의 소박한 인심을 그대로 보여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천역에 도착하여 공전행 열차 시간을 알아보았다. 저녁 7시에 있다고 했다. 의림지에 갔다가 오후 열차를 놓친 것이다. 또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미모의 창구 아가씨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여차저차해서 박하사탕 촬영지에 가야 하는데 공전역 기차 시간을 놓쳐버린 상황이라고 했다. 아가씨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하사탕 촬영지를 가는데 왜 공전역이냐는 표정이다.
“공전역에서도 박하사탕을 찍었데요?”
“인터넷에 그렇게 나와 있던데…….”
“제천 오신 분들 박하사탕 촬영지 보러 다 백운동 쪽으로 나가시던데…….”
“네? 백운동이요?”
“인터넷에 어디서 보셨는데요? 공전역에는 촬영지 같은 것 없는데요?”
“공전역에서 철길 따라 걸어 내려가면 진소천 철교가 나온다고 해서요……. 한 30분정도 걸으면 된다던데요?”
“공전역에서 백운동까지 걷는다고요? 그리고 다시 공전역까지 돌아와서 열차타고 제천으로 들어온다고요? 30분만에는 절대 안 될걸요?”
“그…… 그럼 어떡하죠?”
“밖에 나가서 택시타고 갔다 오시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은데요……. 청량리 행 열차표를 먼저 예매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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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빌어먹을 인터넷이었다. 수많은 블로그에 ‘공전역에서 내려 어쩌구……’라 적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누군가가 실제로 공전역에서 내려서 걸어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모조리 가보지도 않은 채 열심히 그 사람의 글을 긁어다가 마치 자기도 갔다 온 것인 냥 꾸몄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인터넷의 위력에 또다시 한숨을 토해냈다. 백운동이라면 어제 내가 묵었던 민박집이 있던 곳이 아닌가. 쓸데없는 발걸음과 쓸데없이 들어간 비용, 시간들을 생각하니 잠시 쉬고 있었던 담배가 절로 물린다. 연기를 뿜으며 백운동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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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아침에 내렸던 곳에 다시 내리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면서 약간의 자괴감도 들었다. 미리미리 알아본다고 알아봤지만 정작 여행지에서는 모든 정보가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되고 있었다. 버스를 탔던 곳에서 조금 내려와 보니 조그만 간판이 보인다. 어찌나 크게 만들어주셨는지 눈에 너무 띄었다. 10km라면 성인의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어도 왕복 3시간을 잡아야 했다. 서울로 돌아갈 시간까지 계산한 나는 결국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 아저씨는 묘한 충청도 억양으로 뭐하러 여기까지 왔냐고 묻는다. 조선 팔도의 관광지 택시기사는 다 똑같나 보다. 자기 동네에 왜 왔는지가 그렇게 궁금한 것 같았다. 박하사탕 촬영지에 가서 사진을 좀 찍을 생각이라고 하자 인터넷에서 찾아 올리면 되지 왜 쓸데없이 돈을 쓰냐고 한다. 목적이 사진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제부터 시작된 일의 ‘꼬임’에 이제 진이 빠진 터라 열성을 가지고 아저씨를 설득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향하고 있으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10km라더니 한참을 들어간다. 가는 길에 산세가 그만이다. 아저씨는 연신 산세 자랑을 했다. 자기 고장 자랑이려니 하겠지만, 실제로 멋있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워낙 빨리 달리는 차 안이라 초점이 계속 흔들렸다.
드디어 진소천 철교에 도착했다. 내려가자마자 어설픈 그림의 김영호가 나를 맞이한다. 꽤나 괴기스러운 표정이다. 날씨가 좋아져서 망정이지 어제 왔으면 밤잠을 설칠 뻔 했다. 전혀 ‘설경구 형님’스럽지 않고 차라리 원숭이에 가까운 김영호는 동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가 어울리는 곳은 동물원이네, 라고 나직이 중얼거린 후 진소천 철교를 돌아보았다. 사람은 많이 없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사진도 찍고 앉아서 담배도 피우고 하는데 조용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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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사실 진소천 철교는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였다. 누군가 내게 영화를 추천해달라면 당당히 꼽을 수 있는 영화중의 하나가 『박하사탕』이다. 고등학교 3학년 진학을 눈앞에 둔 2000년 1월, 대구 제일 극장에서 대학생이라 속이고 보았던 이 영화는 그 이후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버리고 말았다. 당장 이창동 감독의 뒤를 밟아 국어교육과에 들어오고 만 것이다. 국어 교사, 소설가, 감독의 인생은 나의 로망이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군대 2년을 포함한 6년의 서울 생활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만 말이다.
날씨가 좋은 날 철교의 모습은 내가 원했던 그 모습이었다. 어제의 우울했던 감정이나 꼬이고 꼬이던 일들이 왠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철길 위에서 영호를 삼킬 듯이 달려오던 기차를 떠올리고, 야유회에서 술 먹고 깽판을 치는 영호의 모습을 떠올리고, 다시 기차가 거꾸로 달리고 달려, 1979년 순임에게서 ‘언젠가 한번쯤 와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는 영호를 떠올렸다. 진소천 철교는 언젠가부터 잊고 있었던 나의 로망을 다시 일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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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김영호는 현대사의 거대 담론에 휘말려 버렸다. 그는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으나 세상은 그를 순임을 사랑하는 성실한 청년 노동자로 살게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없던 만큼 피도 눈물도 없었던 전씨 성을 가진 군바리는 그를 광주로 보냈고 여학생을 사살하게 했다. 그 이후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급속도로 순수함을 잃어가다 결국 회귀를 꿈꾸며 자살했다. 나는 그에 비교하면 몇 배는 편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생각해 보았다. 그 전에 단 한번이라도 지금의 나를 예상한 적 없었고, 꿈꾸었던 적 없었다.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결과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는 회귀를 꿈꾸고 있었다. 김영호
처럼 달려오는 열차에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할 정도의 처절함은 없지만 돌아가고픈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로 돌아가려 하는가.
우스갯소리로 2005년 2월 8일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날은 나의 전역 일이었다. 다시는 군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한 농담이었다. 이 외에는 정확하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깊이 해본 적이 없다. 물론 늘 어떠한 일이 있은 후에 “아! 그때 그렇게 할 것을!” 이라고 후회는 한다. 그러나 그 때로 돌아가고자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돌아감을 꿈꾸고 있던 나는 언제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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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털어 끄고 일어나서 주변을 걸었다. 기사 아저씨가 내려준 곳에서 걸어 올라가보니 영화에서 나온 터널과 철길을 볼 수 있었다. 그 곳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김영호가 돌아가고자 했던 때는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었기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허생원이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장소’였다. 그는 동이를 따라 제천으로 향하면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성서방네 처녀가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노새의 방울 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허생원이 어쩌면 추억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레방앗간에서의 그 때로 돌아가려면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허생원은 영리하게도 제천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기에 김영호와 같은 처절함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김영호는 자신의 삶을 돌이켜야 하는 순간이었다. 꿈꾸었지만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죽음을 택하는 것이 돌아갈 때로 돌아가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만약 타임머신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어서 김영호를 1979년의 그 아름다운 봄날로 보내주었다 한들, 1998년의 김영호가 회귀를 꿈꾸지 않았을까. 역사는 그에게 아름다운 봄날을 계속 있게 하지 않았다. 순임과 함께 소박한 사랑을 꿈꾸던 그 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1980년에 광주에서는 민중항쟁이 일어났을 것이며, 영호는 여학생을 사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호가 선택한 죽음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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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진소천 철교는 그러한 처절한 느낌을 담은 곳이라기에는 너무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허생원의 깨달음이나 김영호의 절규에 미치지 못할 회귀에의 바람을 가진 내게 위안을 주었다. 그들과 같은 절실함이 없다한들 세월이 지나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떠올리는 것은 괜찮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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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if]--> 어차피 기차가 안다니는 철길이기에 잠시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이제 나의 회귀를 생각할 시간이다. 군에서 제대하고 정신없이 살면서 입버릇처럼 ‘돌아갈래’를 외치고 있지만 대체 나는 어느 곳, 어느 때로 돌아가려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할 시간인 것이다. 1박 2일의 여행 동안 허생원과 김영호를 생각했다. 나는 그들만큼의 절실함을 가지지 못했기에 돌아감을 꿈꿀 자격이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정착하기 위해 돌아갈 곳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실제로 내게는 존재하지 않기에 회귀를 생각할 자격이 없지 않은가 라고도 말해보았다. 모두 옳은 말이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에서처럼 나는 일종의 정신적 실향민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아갈 용기도, 돌아갈 희망도 없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불쌍하게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서울로 갈 열차시간이 1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이제 일어서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고는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김영호를 향해 덮쳐오던 열차가 가야했던 길이 보였다. 그 길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돌아갈 곳이 생각났다. 지금은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9동 251-174번지 지층 3호의 작은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한 몸부림을 벌일 때
다. 끝없는 정신적 장돌뱅이의 삶 속에서 회귀를 꿈꾸게 될지라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돌이켜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게 될지라도 관계없다. 지금은 서울로 돌아가서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할 때인 것이다.